본문 바로가기
삶은 여행/경상도

문경 석달동 양민학살 사건 추모제

by 삶은 여행 2016. 7. 10.

2016년 7월 10일 추가한 내용입니다.


문경양민학살 사건을 다녀온지 2년이 지난 후에 시사팟캐스트 '이이제이'에 문경양민학살 사건에 관한 내용이 나왔습니다.


팟캐스트를 들어보시면 양민학살사건의 전반적인 내용을 보다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이이제이 듣기


-----------------



문경시 옛 점촌이 제 고향입니다.

사실 요즘처럼 경상도 출신이라는 것이 챙피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정말 쪽팔려서 못살것 같습니다. ㅠ

억양을 바꿀수 있다면 바꾸고 싶을 정도입니다.

어찌되어거나 멘붕에 빠지지 않고 힘내서 5년동안 지역주민의 생각과 마음을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감성적인 설명과 아울러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데이터를 가지고 설득을 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울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2012년 12월 24일 멘붕여행 3일차에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동에 다녀왔습니다.

이곳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문경양민학살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사건이 일어난 시간은 1949년 12월 24일입니다. 요즈음으로 치면 크리스마스 이브날 24가구 127명이 사는 주민들중에서 86명이 국군에 의하여 사살당하는 엄청난 대학살이 일어난 곳입니다.

사실 저도 작년까지만 해도 이러한 사건이 있었는지 자세한 정황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내가 태어나 살던 곳에서 일어난 일정도는 최소한 알아야 하지 않겠나하는 마음에서 20회 합동위령제를 하고 있는 석달동을 찾았습니다.

그동안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에 대한 사죄의 의미도 있었습니다.


유족대표되시는 분이 추모사를 하고 있습니다.

뒤의 위령제 현수막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추모제는 학살이 일어난지는 63년이 되었지만 추모제는 20년밖에 진행하지 못했다합니다.

왜 20년만 할 수 있었냐고요

만주군 장교로 가기전에 문경초등학교에서 한때 선생질을 한 그분이 살았던 지역이고, 레이디가카가 이야기하는 구국의 혁명인 5.16으로 인하여 희생자 유가족들은 43년동안 거의 끽소리도 못하고 사셨다고 합니다.

그나마 20년전부터는 합동위령제라도 지낼 수 있었다 합니다. 참 세상 불공평합니다.^^


 

유족대표와 경과보고를 하신 유가족에 의하면 일가족이 몰살하거나 연락이 두절된 유가족 등이 있고, 개별소송으로 국가의 보상을 받을 수 있어서 개별소송을 진행중이라 합니다.

뭐 이딴 나라가 다 있나 모르겠습니다. 


석달동에서 대학살의 내용을 보면 5살 미만 어린이 11명을 포함해서 15세 미만 어린이가 총 32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주민들을 빨갱이로 몰았다고 합니다. 

 

위령제가 열리는 곳이 3차 양민학살이 일어난 곳이며, 현재 보이는 곳이 석달동 마을이 있었던 자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더 기가막힌 일은 신성모 국방장관이 1950년 1월 17일 현장에서 4km 떨어진 김용국민학교를 다녀갔고 주민들을 위로하였으며, 그 이후 이익성 문경경찰서장과 이기용 산북지서 주임이 직위해제되어 경찰복을 벗었고, 국군들에게 저질러진 석달동 양민학살이 공비들이 저지를 소행으로 둔갑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국군이 저지른 양민대학살을 공비들에 의한 학살로 둔갑을 시켜버린 것입니다.


이분들이 당시 생존하신 분들이십니다.

지난 60여년간 이분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합동위령제가 열리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대학살이 일어난 곳이고 시신을 수습해서 묻은 곳이라 합니다.

당시에는 이곳에 마을이 있었고 현재의 마을은 여기서 500미터 정도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유족과 유가족분들이십니다.


 

참으로 슬픈 광경입니다.

합동위령제라 수저와 숟가락이 모두 86개씩입니다.

 

당시에 목숨을 건진 유가족 대표님이십니다.


  

문경시 해당 기관장이 참석하지 않아서.... 아니면 사전에 참석여부를 확인해 주지 않아서인지 20분 정도를 기다리면서 마을 이야기를 해 주셨던 유족분들이십니다. 

끝에 보이시는 할머니께서는 가족들 아래에 깔려서 죽지 않았다 합니다.

 

석달동 양민학살 사건 경과보고를 해 주신 유가족분이십니다.

 

합동위령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번 위령제가 열리는 장소를 뒤돌아 봅니다.

두번 다시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정부는 하루빨리 유가족 분들의 국가가 저지를 학살에 대하여 보상을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지역 국회의원 양반 역시 특별법 제정을 위한 노력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문경시청 관계자 여러분

아무리 춥더라도 좀 나와서 함께 합동위령제를 하시기 바랍니다.

시청 관계자는 한명도 안 나오고, 면장만 보내깁니까?

지역 주민의 어려운 점이 있으면 선출직들이 앞장서서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 

면장 역시 문경시청 관계자이긴 하지만 본청에 있는 인간은 한놈도 안나왔습니다.

권력에만 눈먼자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 자료 일부를 옮겨 놓습니다.


전체 자료는 첨부파일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김원지 외 85명은 1949년 12월 14일(음역 11월 5일) 정오경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현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동)에서 국군 제2사단 제25연대 제2대대 제7중대 제2소대 및 제3소대에 의해 집단 총살되었다.


중략


가해부대의 지휘명령체계를 살펴보면, 제2사단장 송호성 준장, 제25연대장 유해준 중령, 제2대대장 권정식 대위, 제7중대장 유응철 대위, '제2소대장 대리' 안택효 중사, 제3소대장 유진규 소위였다.


'제2소대장 대리' 안택효와 제3소대장 유진규는 사건 현장에서 소속 부대원들에게 석달마을 주민들을 집단총살하도록 직접 지시, 명령하였던 초급 지휘관이었다. 제7중대장 유응철은 현장에서 주민 총살을 명령하였던 지휘관은 아니지만, 사건 발생 직후 사건의 전모를 보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상급 지휘관에게 허위로 보고하여 사건을 은폐, 조작하였다. 한편 제25연대장 유해준은 이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고, 제2사단장 송호성과 제3사단장 이응준 소장은 간접적인 책임을 지고 각각 해임된 것으로 보아,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도 이 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는 사건을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무마하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경을 포함한 경북지역의 공비토벌작전은 태백산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이성가(李成佳) 대령]의 지휘통제를 받았고, 그 권한은 국방장관으로부터 위임된 것이었으며, 최종적으로는 국군 통수권자이자 국가원수인 대통령으로 귀속된다. 따라서 이 사건의 책임은 최종적으로는 국가에 귀속된다


중략 


사건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는 국군이 전시이거나 긴급한 전투 상황도 아닌 시점에 산간 지역 주민을 공비토벌작전의 명분하에 불법 총살한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이었다. 공비토벌의 임무가 아무리 중요했다 하더라도 비무장 민간인을, 그것도 상당수가 노약자나 부녀자인 동네 주민 전원을 아무런 확인 과정이나 적법한 절차를 따르지 않고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하게 총살한 것은 반인륜적인 집단학살이며 명백한 위법행위이다.


10.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가 문경 석달사건과 관련하여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건 관련 희생자와 유족들 및 국민들에게 사과할 것과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및 위령사업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다.



 석달.pdf


 문경양민학살사건.pdf


'석달'파일 뒤에는 부일장학회 재산 등 강제헌납의혹 사건에 대하여서도 나옵니다.






요즘트위터페이스북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