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강원도

허난설헌 생가터 방문

삶은 여행 2013. 7. 17. 09:38



드디어 꼭 가려고 마음먹었던 난설헌 허초희 생가터를 다녀왔습니다.

살고있는 눈이 온다고 하는 일기예보를 믿고 양평에서 강릉으로 가는 기차편을 이용하였지만,

헉^^ 왠만큼 동남아시아 비행기 타고 가는 시간인 다섯시간이 걸립니다.

ㅠㅠ 살고 있는 곳에서 강릉으로 가는 고속버스가 자주 없으니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ㅠ


강릉시 초당동에 허난설헌 생가터는 있습니다.

^^ 도착해서 보니 앗, 이곳은 언젠가 한번 와 본 곳입니다.

분명히 건물의 형태와 소나무 숲이 너무나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그렇지만 처음 방문일 것이다라는 생각만 가지고 왔네요 ㅋ

그때는 난설헌 허초희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 몰랐나 봅니다.

와서 보니 그때는 한옥집 한곳을 들렸다는 기억밖에 ㅠㅠ

역시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껴지나 봅니다.


매시 정각에 문화해설사 분께서 해설을 해 주십니다.

30분 정도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변 풍경을 둘러보고 있노라니

문화해설사 선생님이 오십니다.

일단 해설사 선생님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설명을 듣습니다.



강릉은 소나무가 참 인상적인 곳이라는 생각을 한번 더 하게 됩니다.

앗 그러고 보니 담장도 돌담이 아닌 흙으로 되어 있습니다.


파란색 하늘이면 어떨까하고 색온도를 많이 낮게 했습니다. 약 3000켈빈정도로?

일반적으로 형광등 모드에 놓고 찍으면 조금더 파란색 하늘이 보입니다.


초당 허엽과 악록 허성, 하곡 허봉, 난설헌 허초희, 교산 허균 등 허씨 집안 사람들이 가끔 이곳에서 산책과 명상에 잠겨있었겠죠


생가터의 우물입니다.

우물로 나오는 문이 따로 있습니다.


생가터 옆에 있는 난설헌 허초희 동상입니다.

이 동상도 그녀의 영정사진처럼 허씨집안 여자분들을 여러분 합성하여 만든 것일것입니다.-문화해설사님의 설명입니다.


허균, 허초희 기념관입니다.

이곳에서 어떤 어르신 한분께서 관람객들을 상대로 아주 많은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해설사는 명찰은 달고 있지 않았으며, 

허균, 허초희와 관련한 많은 내용을 따로 특강?형식으로 30분 넘게 들었습니다.

ㅠ 이제 늙어서 정확한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습니다.

다만, 느낌은 미리 공부를 하고 여행을 떠나니 훨씬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허씨 집안의 5명의 뛰어난 분들의 시비입니다.

이 네명의 아버지인 초당 허엽(순두부로 유명한 초당동이 허엽의 호에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하는 설도 있다고 하지만, 허엽이 이 동네의 이름을 따서 호를 지었다는 설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하기도 합니다.)이 가장 존경받아야 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여자인 허초희를 차별하지 않고 글과 시를 가르쳤으며, 당시 사대부에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서얼 출신인 손곡 이달을 허균과 허초희의 스승으로 삼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합니다.

손곡 이달은 두번째 부인의 첫아들인 하곡 허봉의 친구였다고도 합니다.

허균이 후일 조선에서는 유일하게 사면받지 못한 역모죄로 극형에 처한 것과 진보적인 자유주의자인것도 어느정도는 손곡 이달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허초희 생가터의 대문입니다.

이곳에서 허초희는 6살때까지 살았다고 문화해설사님이 설명을 해 주십니다.

그 다음은 어디서 살았을까요? 문화해설사 님은 간단하게 설명해 줍니다. 서울에서 살았다고. ㅠㅠ

이 고택은 약 200년이 조금 넘은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허균이 역모죄로 처벌을 받았기에 허초희가 살던 집 그대로의 모습은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흙으로 된 담이 참 이쁩니다. 


어느 한옥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문으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참 아름답습니다.


허초희의 영정사진입니다.

해설사님의 설명으로는 3명의 허씨 집안 여성을 합성하여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저는 잘 모릅니다. ㅋ-


강릉 선교장하고 비교하면 굴뚝이 참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건물이 언젠가는 화재가 있었지 않았나 합니다.

탄 흔적이 보입니다.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해주는 담입니다.

실제로 못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고개만 들면 다 보입니다.


허초희 생가터에서 가장 재미있게 본 부분입니다.

올라가지 마시오라고 되어 있는 부분은 직선 마루가 아니라 삼각형 마루입니다.

안채 쪽에서 찍은 사진인데 저 문 뒤로는 방이 아니라 마루입니다.

안채에서 사랑채 마루가 바로 들여다 보이지 않도록 해 놓은 문입니다.


이런 문을 뭐라고 칭하는지 모르지만 문을 열어서 다시 들어올려 놓을 때 사용한 받침대 입니다.

추가 ; 구글 검색을 해 보니, 이런 문을 <들어열개 창>, <들어여개 문>, 한문으로는 <조문>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처마에서 내린 그림자 선이 정말 이쁘게 보였습니다.


뒷 마당에서 사랑채 쪽으로 나 있는 쪽문? 들입니다.

뒤에 닫혀 있는 문을 열면 사랑채 옆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허초희는 저 문을 들락날락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자그마한 굴뚝이 이쁘죠?

그리고 처마와 지붕을 이어주는 선들이 참 부담없이 볼 수 있습니다.



배롱나무라 합니다.(또다른 배롱나무 설명)

배롱나무는 강릉 선교장에서도 봤습니다.


사랑채 전경입니다.


아까 위에서 설명한 사랑채와 안채를 드나들수 있는 쪽문입니다.

삼각형인 마루도 보입니니다.


안채 전경입니다.

마당 한 가운데 나무가 한그루 있습니다.

아마도 봄에는 화려한 꽃이 필것 같습니다.


안채에서 바라본 집밖에 있는 우물로 가는 길입니다.


안채를 나와서 우물로 가는 길입니다.

양쪽이 흙담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옆의 배롱나무 꽃이 떨어지는 계절이면 저 길이 붉은 카펫 처럼 바닥에 떨어진다 합니다.

요즘말로치면 레드카펫이라고 해설사님이 이야기 하십니다.


우물로 가는 대문 앞에서 안채쪽을 바라봅니다.


과도한 푸른빛을 주고 배롱나무 잔가지로 하늘을 갈라봤습니다.


안채의 뒷마당입니다.


안채 뒷마당에서 바라본 그림자입니다.

한옥의 선은 정말 아름답고 부담이 없습니다.


이 담이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하는 담입니다.

마당쪽으로는 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오픈된 공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담이라기 보다는 그냥 상징적인 구분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듯 합니다.



3회에 걸쳐서 난설헌 허초희와 관련된 곳을 다니고 글을 올렸습니다.

경기도 광주에 초월읍에 있는 난설헌 허초희의 묘는 그녀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더 해 주었고

그녀의 스승인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1리에 있는 손곡 이달 시비를 찾아가는 길에서는 

최초의 한글 소설을 작성한 교산 허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서자 출신이어서인지 손곡 이달과 관련한 유적이 없음이 몹시 안따까웠습니다.

또한 이번 여행을 통해서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라는 곳을 알게되었으며, 

이 분들 덕분에 손곡 이달의 흔적을 찾았음을 감사하게됩니다.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시를 썼기에 조선최고의 여류시인이고 

당시 중국에서 난설헌 허초희의 시가 그렇게 인가가 많았는지 

알아보려고 현대어 한글판 허초희 시집도 한권 구매했습니다.


이제 강릉은 허초희와 많이 비교가 되고 있는 

신사임당의 유적이 있는 오죽헌을 다시 방문하려고 합니다.

불행히도 신사임당은 허초희와는 다르게 이름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허난설헌은 당시로는 김성립에게 시집을 갔지만

신사임당은 친정에서 결혼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서 소위 허초희는 '친형'이라는 제도에 따른 1세대라고 합니다.

아마도 허초희가 자신의 친정인 강릉이나 서울에서 결혼생활을 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여행의 새로운 여행의 주제는 교산 허균으로 하려고 합니다.

허균의 발자취를 따라다니면서 그의 삶을 알아보고 싶네요.

역모죄로 극형에 처해지고 조선이 끝날때까지 그는 사면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로서 초당 허엽은 훌륭했지만

그와 그의 둘째부인에게서 태어난

하곡 허봉, 난설헌 허초희, 교산 허균 이렇게 세명의 형제중에서

하곡과 난설헌은 요절을, 허균은 역모죄로 처형을 받았습니다.


허균의 발자취를 어디서 부터 찾아가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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