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소막성당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6호인 용소막 성당입니다. 일전에 '금모래은모래'님이 '한결같이'의 추천으로 다녀오시면서 아주 좋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도 이곳을 가자고 꼬십니다. 물론 '한결같이'를 꼬셨습니다. 풍기 또는 영양, 봉화 등지로 여행을 떠나는 중간이니 들렸다 가자 ㅎ
사진은 금/은모래님이 이 구도에서 사진을 찍으면 좋겠다는 조언이 있었던 지점입니다. 아쉽게도 나무에 가려 성당의 모습이 잘 보이지는 않습니다.
6월의 마지막 주말 한낮은 여느해의 8월의 더위를 느끼게 합니다.
태양은 중천에 떠 있고 한발자국만 움직여도 땀이 물흐르는 듯 합니다.
용소막성당의 전경입니다.
용소막성당은 여러분 스스로 인터넷 검색을 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ㅋ 그것도 귀챦으시면 ==>> (용소막성당 자료보기)
간략하게 보면 강원도에서 풍수원(횡성), 원주 성당에 이어 세번째로 설립된 성당이라고 합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수원지방에서 피난 온 몇몇 신자 가족들이 강원도 평창지역에 살다가 박해가 뜸해지자 일부가 1890년경에 제천군 송학면 오미에 정착하게 되었고 1893년부터 오미에서 용소막으로 이사를 오기 사작했고, 1899년 용소막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1904년 5월에 백낙훈이 신부가 사용할 집 한채를 마련하자 최도철 회장이 용소막 공소를 본당 승격 청원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1910년에 용소막 본당은 교세가 1,238명에 달하였다고 합니다.
현제 본당은 1913년부터 시작했으며, 1914년에 가을에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성당신축 공사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착공한지 3년만인 1915년 100여평 규모의 벽돌 양옥 성당을 완공하였다고 하며, 성당 지붕이 가파른 것은 당시 중국인 기술자들이 도면대로 짓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기둥의 길이를 2자씩 잘라내고 지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당시 총신자수는 2,081명이었다고 합니다.
1941년에는 주민들의 문맹 퇴치와 전교를 위해 4년제 학교인 '명덕국민학원'을 설립하였으며, 1943년에는 대동아전쟁을 벌이던 일본군에 의해 성당의 종을 공출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합니다.
한국전쟁때는 성당은 공산군들의 식량 창고로 전락되었고 성당 내부의 성모상이 총탄을 맞아 목과 선신이 파손되었다고 하며, 아울러 명덕국민학원 교사와 본당 사목 문서도 모두 불에 타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성당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공소막 성당은 10여년 전부터 신자들이 메주와 된장을 제조 판매하여 그 수익금으로 열악한 본당의 재정을 돕고 있다고 하며, 피정의 집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용소막성당은 내부 수리를 위해서 한창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공사개요 입간판이 성당 앞마당에 걸려있고 공사를 하시는 분들은 모두 자격을 가진 문화재 전문가들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용소막성당의 측면에서 바라봅니다.
하늘과 첨탑이 참 잘어울린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무엇을 기원하고 있을까요? 사진을 찍기위해서 무릎을 꿇고 바라봅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기도할 것인가?
성당내부가 공사중이라 안으로 들어가보았습니다.
성당은 이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고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성당 내부의 전등도 담아보고요
성당 내부에서 바깥쪽을 바라보면서 사진도 한장 남깁니다.
내부 공사중이라 좀더 쉽게 성당내부에서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성당 내부에 있는 2층의로 올라가 봅니다.
2층에서 뒷편의 창도 다시 한번 더 바라보고요
용소막성당 내부는 현재 이런모양으로 내부수리를 하고 있습니다.
용소막 성당 뒷편에서 바라본 용소막성당 모습입니다.
아마도 사제관과 수녀님들의 거처로 올라가는 길인듯 합니다.
올라가지 말라고 하니 더 이상 오르지 못합니다. ㅠㅠ
조경으로 만든 십자가와 용소막성당의 십자가의 조화?!
성당입구에는 '평화통일'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돌이 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기원해 봅니다.
언제나 남북한이 사이좋게 지내는 날이 올지... 내가 살아서 내 두다리로 움직일 수 있을때 그런 세상을 만날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