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연영 의사 106주년 순국추모식에 참가를 하였습니다. 동네의 일이라 그리고 일하는 단체가 주관단체로 참여하는 행사이고 예정에 없는 추모제의 사회를 맡아서 진행하였습니다.
사진의 인물은 구연영 의사의 유족대표이시며, 유족을 대표하여 구연영의사 추모제에 대한 감사인사와 함께 구연영의사의 살아생전 고초와 고난을 당하셨던 기억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당시 국민학교 6학년 정도였으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시고 계십니다. 또한 당시의 상황을 정리하여 책으로 발간을 하셨다고 합니다.
구연영의사추모제는 이천중앙감리교회에서 개최되고 있습니다. 사진의 중앙부분 앞자리가 내빈들입니다. 106주년 추모식에는 이천시부시장과 윤희문 도의원, 각 단체 회장님들이 참석하였습니다. 많이 바쁘신 국회의원과 시장은 참석을 하지 않았네요. ㅠㅠ 그리고 사진의 왼쪽 상단 앞자리에 자리잡고 계시는 분들이 유족분들이십니다.
구연영의사 추모행사에 참석하신 지역의 단체장님들과 감리교회 목사님들이십니다. 유족분들도 함께 하셨습니다.
구연영의사 추모제에 참석하신 내빈들이십니다. 초첨이 가장 잘 맞는 위치의 분이 저와 함께 일하고 계시는 이천YMCA 박종환 이사장님이시고, 그 앞쪽에 계시는 분이 이천YMCA 증경이사장이신 이교선 이사장님 그리고 그 바라 옆쪽이 조명호 이천문화원 원장님이십니다. 그리고 두번째줄 왼쪽편에 앉아 계시는 분이 이원회 회장인 이상구님이십니다.
구연영의사 추모제는 감리교회에서 주관하는 행사라 예배도 함께 합니다.
구연영 의사의 활동을 좀 알아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구연영 의사는 이천지역의 독립운동가 중 한분이시며, 특히 구연영은 경기도 의병의 중심지인 이천에서 활약을 하였습니다.
이천의병의 첫 전투는 1896년 1월 18일에 있었으며, 지금의 이천과 광주의 경계지점인 넋고개 - 동원대학교가 있는 고개 -에 서 매복해 있다가 적군을 습격하여 광주 노루목까지 추격해 패퇴시겼다. 이후 일본군은 군사력 우위를 확보하고 2월 12일 새벽 이천을 기습하였고 의병은 2틀간의 전투에서 화력의 열세로 의병측 패전으로 끝나게 되었으며, 구연영은 원주로 피신후 20여일만에 이천에 귀환하였고 진지를 광주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그러나 의병군은 관군측의 안간책에 넘어간 김귀성과 박준영의 배신으로 3월 22일 남한산성에서 퇴각하였다.
이들은 김하락을 중심으로 구연영, 신용희, 김태원 등이 모여 김하락의 고향인 경상도로 옮겨 그곳에서 모병한 후 다시 북상하기로 하였으며, 이들은 여주, 단양, 안동 의성등을 거쳐 의횽 압곡사에 진을 쳤고 여기서 안동지방 의병과 충정도에서 내려와 안동에 자리잡은 서상렬의 의병과 연합 작전을 펴 강북지방이 을미의병의 주요 활동지가 되었다. 구연영은 의병전투 과정에서 화력의 열세를 절막ㅁ하고 경기도 출신 의병 30여명을 거느리고 회군하는 결정을 내린다.
이후 구연영은 6개월 동안 고향인 광주에서 칩거후 1897년 그 어느 누구에게도 전도받지 않고 상동교회로 찾아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기독교인이 된 후 가장 먼저 그 집안에서 양반, 상인의 신분적 구별을 철폐하는 등 혁신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당시 기독교는 구연영에게는 새로운 힘의 근원이라고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1894년 동학운동 이후 청일전쟁, 의병활동을 겪으면서 민중은 많은 시련을 겪게 되었는데 그 피난처의 하나로 교회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선교사를 배경으로 한 기독교는 청, 일 양국 군대가 조선 정부도 침범할 수 없는 치외법권적인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민중에 눈에 비치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1895, 96년 피난가는 일반인들까지도 자기 재산을 교회에 맡길 정도로 교회는 민중의 보호기능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감리교의 경우 1895년 교인 수가 9백56명 이었던 것이 1897년에는 2년 사이에 2천8벡88명으로 3배 이상 증가를 보이고 있다.
구 연영이 자진하여 상동교회를 찾아간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그가 입신한 후에 선교사들은 3년이나 있다가 그에게 세례를 주고 정식 교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구곡의 은총을 강조하는 선교사들과 교회를 민족운동의 매개체로 삼으려는 구연영 사이의 갈등은 3년 동안의 권서인인 - 한국교회 초기에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면서 성경을 가지고 판매한 일종의 외판 행상을 벌이는 이들을 일컫는 말로 매서인으로 불리기도했다. 이들은 단지 성경을 판매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산간벽촌에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한 복음 전도인들이었다. 권서인은 성경 반포의 주역이자 전도인이며, 선교사들이 가지 못한 전국방방곡곡을 돌아다닌 복음전파의 선구자들이다. - 활동과 상동교회 전덕기(상시속장)을 중심한 "엡윗청년회" 활동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다.
구연영은 엡윗청년회를 통해 인본주의적 사회체제를 습득했으며, 민족운동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민족의식을 형성하였다. 그는 이러러한 의식변화에 따라 집으로 내려가 당시 양반으로서는 할 수 없는 그 스스로 신분제를 타파하였고 노비나 양인들을 존중하였다. 그는 1899년 3월 덕뜰에서 세례를 받았고 세례를 받은 후 정식으로 권서인이 되어 광주, 이천, 여주, 장호원 지역을 다니며 성서, 교리서를 팔면서 전도하였고 덕뜰을 효시로 궁뜰, 노루목, 오천, 오향 등지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의병장 구연영은 전도인 구연영이 되었고 민중구원을 선포하는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이천구역 24개 교회를 돌보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정서도 권사가 되어 함께 이천, 광주지역의 교회를 돌보았다. 그는 선교활동 중에서도 민중 자신이 민족문제를 심각하게 이해할 때 민족운동은 보다 강력한 힘을 얻어 추진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는 자기가 맡은 구역의 교회들을 순회하며 기독교 복음과 함께 민족의 현실을 계몽하는 강연을 하였다.
특히, 1904년 일제의 괴뢰단체로 설립된 일진회의 정체 폭로가 그의 단골 강연주제였다. 일진회의 내막에 숨겨진 일제의 조선침략정책을 폭로하여 우선 눈에 띄는 경제침략에 대항키 위해 일어나고 있는 국채보상운동도 교회조직을 통해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는 아들 정서와 함께 교회청년들을 중심으로 구국회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결국 그가 데리고 있던 이용주의 밀고로 아들 정서와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었으며,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결국 이천 장터 미류나무에 묶인채 아들과 함께 총살당하였다. 구연영의 나이 44세, 아들의 나이 25세 였다고 한다.
|
|
|
창전동(서거 추정장소) 구연영 의사 순국기념비 이천중앙감리교회 앞마당 구연영의사 추모비 대전국립현중원 구연영, 구정서 묘
구연영의사 추모제의 주관단체로 참여하고 계시는 이원회 회원분들이십니다. 저도 거의 다 알고 지내는 분들이십니다. 사진의 왼쪽에서 6번째가 김응호 전교육장님이십니다. 이천이 고향으로 이천교육장을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물러나셨으며, 구연영의사 100주년을 계기로 구연영의사 추모제를 지역사회와 함께 하려고 노력하신 분이시며, 추모제 행사를 할 수 있도록 가장 큰 공로를 세우신 분이십니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에서 길을 묻다 (0) | 2013.09.17 |
---|---|
교학사 뉴라이트 교과서 검토 보고서 (0) | 2013.09.11 |
통일은 자전거를 타고 옵니다. YMCA자전거 순례단 (0) | 2013.08.01 |
이천YMCA청소년교향악단 여름연주회 안내 (0) | 2013.07.24 |
이천시 300mm 가까이 내린 비 천재지변? 사후복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전부일까? (2) | 2013.07.23 |